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찰스 1세 (문단 편집) === 자녀 === || '''자녀''' || '''이름''' || '''출생''' || '''사망''' || '''배우자/자녀''' || || '''1남''' || [[찰스 2세]][br]{{{-2 (Charles II)}}} || [[1630년]] [[5월 29일]] || [[1685년]] [[2월 6일]] || [[브라간사의 카타리나]] || || '''1녀''' || [[프린세스 로열 메리(1631)|오라녀 공비 프린세스 로열 메리]][br]{{{-2 (Mary, Pricess Royal and Princess of Orange)}}} || [[1631년]] [[11월 4일]] || [[1660년]] [[12월 24일]] || 오라녀 공 빌럼 2세[br]슬하 1남[* [[윌리엄 3세]] ] || ||<|2> '''2남''' ||<|2> [[제임스 2세]][br]{{{-2 (James II)}}} ||<|2> [[1633년]] [[10월 14일]] ||<|2> [[1701년]] [[9월 6일]] || [[앤 하이드]][br]슬하 2남 2녀[* [[메리 2세]], [[앤 여왕]] 등] || || [[모데나의 마리아]][br]슬하 2남 2녀 || || '''2녀''' || 엘리자베스 공주[br]{{{-2 (Princess Elizabeth)}}} || [[1635년]] [[12월 29일]] || [[1650년]] [[9월 8일]] || || || '''3녀''' || 앤 공주[br]{{{-2 (Princess Anne)}}} || [[1637년]] [[3월 17일]] || [[1640년]] [[11월 5일]] || || || '''3남''' || 글로스터 공작 헨리 스튜어트[br]{{{-2 (Henry Stuart, Duke of Gloucester)}}} || [[1640년]] [[7월 8일]] || [[1660년]] [[9월 13일]] || || || '''4녀''' || [[헨리에타 앤|오를레앙 공작부인 헨리에타]][br]{{{-2 (Henrietta, Duchess of Orléans)}}} || [[1644년]] [[6월 16일]] || [[1670년]] [[6월 30일]] || [[필리프 1세(오를레앙)|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]][* [[루이 13세]]의 차남.][br]슬하 1남 2녀 || * 장남: [[찰스 2세|웨일스 공 찰스]](1630년 [[5월 29일]] ~ 1685년 [[2월 6일]]) 훗날의 찰스 2세. 같은 이름의 형(1629년생 찰스)이 있었지만 태어난 다음 날 죽었다. 멸망한 왕조를 복구한 이후 혁명으로 목이 날아간 아버지 찰스 1세와 달리 귀족층들의 지지를 끌어내며 안정적인 정치를 펼치기도 했으나, 굉장한 호색한이었고, 낭비벽이 심했다. * 장녀: [[프린세스 로열 메리(1631)|메리]](1631년 [[11월 4일]] ~ 1660년 [[12월 24일]]) 메리가 낳은 아들 오라녜 공 윌리엄은 후일 [[윌리엄 3세]]가 되었다. * 차남: [[제임스 2세|요크 공작 제임스]](1633년 [[10월 14일]] ~ 1701년 [[9월 6일]]) 훗날의 제임스 2세. 형 [[찰스 2세]]가 적자 없이 세상을 떠난 뒤 왕위를 이어받았다. 왕의 목을 자른 나라에서 용케도 전제정치를 펼쳤고, 결국 [[명예혁명]]으로 폐위되었다. * 차녀: 엘리자베스(1635년 [[12월 29일]] ~ 1650년 [[9월 8일]]) 찰스 1세가 처형당하기 전날인 1649년 [[1월 29일]], [[올리버 크롬웰]]의 허가로 남동생 헨리 왕자와 함께 찰스 1세를 면회할 수 있었다.[* [[찰스 2세]]와 [[제임스 2세]]가 면회하지 않고 해외에 꽁꽁 숨었던 이유는 크롬웰 일당에게 잡히면 무조건 처형당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. 그에 비해, 엘리자베스와 헨리는 왕위 계승 서열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살해당하진 않을거라 여겼고, 설령 살해당해도 왕당파가 큰 타격을 입지 않았다.] 그 자리에서 찰스 1세는 '''네 어머니(헨리에타 마리아)에게 더 이상 만날 수 없다고 전해라'''라고 했고, 찰스 1세, 엘리자베스 공주, 헨리 왕자가 서로 부둥켜 안고 울었다고 한다. 이 때문에 마음의 병을 얻었는지 1650년 [[9월 8일]] 15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. 여담으로 이 면회를 지켜본 [[올리버 크롬웰]]마저 이 가족애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. * 3녀: 앤(1637년 [[3월 17일]] ~ 1640년 [[11월 5일]]) * 3남: 글로스터 공작 헨리(1640년 [[7월 8일]] ~ 1660년 [[9월 13일]]) 누나 엘리자베스와 함께 처형 전날에 찰스 1세를 면회했던 인물. 찰스 1세는 자신이 처형당한 이후 의회파가 헨리를 옹립할 것이라고 여겼는지, 그에게 "이 아비(찰스 1세)는 죄가 없단다. 너희 형들이 죽지 않는 한 너는 왕위에 오를 수 없단다. 그러니 저놈들(크롬웰 파)이 널 옹립하려 해도 너는 거부해야 한다."라는 유언을 남겼다. 그러나 크롬웰은 왕정을 붕괴시키고 공화정을 연 다음 독재자가 되었기 때문에 헨리가 왕이 되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. 자신의 아버지를 처형한 사람임에도 헨리는 [[올리버 크롬웰|크롬웰]]에게 교육을 받아 크롬웰을 옹호하고 개신교도가 되었다. 이에 어머니의 종교인 가톨릭교를 매우 혐오하게 되어 어머니와 사이가 매우 냉랭했다고 한다. 1660년에 천연두로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. * 4녀: [[헨리에타 앤]](1644년 [[6월 16일]] ~ 1670년 [[6월 30일]]) 이름은 어머니에게 따온 듯하다. 아버지 찰스 1세와 어머니 헨리에타 마리아가 1644년 4월 청교도 혁명의 여파로 헤어지게 되었는데, 이때 헨리에타 마리아는 찰스 1세와 만난 게 '''마지막이 될 줄 몰랐다.''' 이후 헨리에타 마리아는 1644년 6월 헨리에타 앤을 출산하였으며 아버지 찰스 1세가 처형된 이후 외삼촌 [[루이 13세]]의 차남 [[필리프 1세(오를레앙)|오를레앙 공작 필리프]]와 결혼했다.[* 참고로 (찰스 2세의 사생아의 후손들을 제외한) 현존하는 찰스 1세의 후손은 모두 헨리에타 앤의 딸 안 마리의 후손들이다. 안 마리가 사르데냐 국왕 [[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]]의 왕비가 되었고, 그 외손자인 [[루이 15세]]와 루이 15세의 사위인 파르마 공작 필리포 1세를 통해 여러 유럽 왕가에 찰스 1세의 혈통이 퍼지게 되었다. [[펠리페 6세]], 룩셈부르크 대공 [[앙리(룩셈부르크)|앙리]], 불가리아의 마지막 차르 [[시메온 2세]] 등의 인물이 모두 헨리에타 앤과 안 마리의 후손들이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